요새 한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는, 또 필자도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 중에 “미운우리새끼 (“미우새”)”라는 것이 있다. 미우새는 물론 노총각 연예인들의 생활을 들여다 보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지만, 여러 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실제로 프로그램 내에서 그 연예인 출연진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그들 노총각 연예인을 둔 어머님들의 재미있는 모습일 것이다. 아들들의 모습들에 때로는 안타까워하기도, 때로는 한심해 하기도 하는 진솔한 모습들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자연스레 그런 어머님들의 감정이 전해지면서 더욱 깊이 프로그램에 몰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어머님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불편한 것이 딱 하나 있다. 필자가 거의 “경멸”하는 수준으로 생각하는 단어 하나를 어머님들이 너무나 자주 사용하기 때문이다.

 

바로 “착하다”는 단어이다.

 

이를 테면 영어의 Kind나 Nice 같은 단어들과는 달리, 우리 말의 “착하다”는 매우 중의적인 단어이다. 특히 그것이 손윗사람에 의해 사용되는 경우 누군가가 “착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들의 말에 “순종적”이어서 “시키는 대로 잘 하는”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착하다는 것은 “반항하거나 토를 달지 않는 부리기 편한 놈”을 형용하는 것인 것이다.

 

오해하지 않아 주셨으면 한다. 필자는 절대로 어른들에 대한 공경이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임을 부정하거나, 우리가 어른들에게, 아니 어른들이 아닌 누구에게라도 버릇없이, 혹은 악하고 못되게 행동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필자는 공경이나 존경 등과 같은 무형의 정신적 가치가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고 더 나아가 앞으로 다양화될 우리 사회를 매우 효과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 믿는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입 닫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미덕인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경험하고 있고 또 앞으로 계속해 나아가야 할 사회나 기술의 진보와 혁신이 어떻게 탄생하는가?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 관습적 지식 (Conventional wisdom) 을 변화된 현재의 상황에 대비 (對比) 해 그 유효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도전하며 그에 따른 진보적 대안이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질문함으로써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가장 창의적이어야 할 예술 교육에 있어서 마저 선생님의 “권위” 아래, 나무는 이렇게 그리고, 바람의 느낌은 저렇게 연주해야 하며 행복의 감정은 이렇게 표현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또 강요한다. 그런 것이 당연한 사회 안에 살고 있으니 당장 내일 세상이 어떠한 진보를 경험하게 될 지도 모르면서 지금까지의 관습적 개념과 사고의 틀을 다음의 세대의 5 년, 10 년, 20 년 후의 미래에 “착하다”는 말과 함께 강요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착하다는 말은 많은 경우, “내가 미래를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니? 그러니까 나도 내 말에 꼭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음… 아, 몰라! 일단 내 말 들어! 그래야 내가 편해!”라는 의미이며, 때때로 우리 말에서 가장 폭력적이면서 과거회귀적인 언어가 된다.

 

필자가 자주 이야기하듯, 완전히 새로운 장을 만들어내는 것을 뜻하는 “혁신”이라는 단어가 오히려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들 중 하나가 되어 있음은 역설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혁신이라는 것, 그리고 “혁신적”이라는 자질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궁극적인 결정요소 (이전의 관련 컬럼) 가 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처럼 혁신적이 되어야 하는 지금, 우리는 관습에 대한 도전을 불허하는 도구인 “착함”을 이제 버려야만 한다. 지금까지의 것에 도전하고 또 우리가 지금 관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도전을 허락해야 한다. 혁신적인 사회는 과거회귀적인 착함을 원하지 않는다. 혁신적인 사회에서의 덕목은 진보, 그리고 그를 위한 도발적인 도전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