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에서 “모델(model)”, 혹은 “(반복되는) 유형(Pattern)” 등의 의미로서 사용되던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단어를,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근대적 용어로서 최초로 정의한 것은 미국의 과학철학자인 토마스 쿤(Thomas S. Kuhn)이었다. 그에 따르면 패러다임이란, 특정인들의 집단에서 본보기가 될 수 있는 문제들과 그 해결책들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과학적 업적[1]을 의미한다. 쿤이 내린 정의에, 그것이 과학의 범위를 넘어선 다른 분야에 적용될 수 있도록 약간의 유연성을 첨가한다면 패러다임은 이제 “어떠한 개념을 정의해줄 수 있을 예시적 성격을 가진 일련의 개념이나 행위들”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패러다임에 대한 그와 같은 정의를 우리 벤처 생태계, 그 중에서도 항상 반복적으로 논의되는 화두인 ‘스타트업들의 글로벌 시장 진출’에 대응시킬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 스타트업들의 글로벌 시장 진출 및 그 일련의 프로세스들에 존재하는 패러다임은 큰 틀에서 ‘창업의 장려를 위한 각종 마중물을 활용한 국내에서의 스타트업(Start up, 창업) – MVP 등 초기 프로덕트(Product)의 설계 및 개발 – 프로덕트의 국내시장에서의 초기 검증(Initial Validation) – 추가 자원 획득 – 해외 시장 진출 모색’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국내 생태계가 가진 그와 같은 글로벌 시장 진출에 대한 패러다임은, 국내에서 초기 검증이 이루어진 프로덕트를 해외 시장에 소개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해외 투자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결과 투자가 유치되면 로컬리제이션(Localization, 프로덕트의 현지화)를 비롯한 글로벌 현지 시장의 진입을 위한 프로세스를 시작할 수 있다는 논리 위에서 세워진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의아한 것은, 그와 같은 패러다임 내에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시장 그 자체에 대한 고려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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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미국 생태계 내 M&A 시 기업가치배수(Valuation Multiple) 추세 (Source: Pitchbook)

 

위 Figure 1 은 미국 생태계 내에서 관찰되는 스타트업의 Exit 시 기업가치(Enterprise Valuation, 이하 “EV”)의 추세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안점을 발견하게 된다.

 

  • (적어도 미국 시장 내에서) 스타트업의 EV는 실제 시장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산정
  • EV는 해당 기업의 EBITDA의 연장선 위에서 산정되며, 전통적으로는 EBITDA 대비 9x, 그리고 가장 최근의 2015 년 4 분기에 와서는 EBITDA 대비 9.5x, 즉 9.5배 수준에서 결정됨
  • Exit 시 기업의 Equity, 즉 자본은 일반적으로 EBITDA 대비 4x 수준으로, 이는 스타트업이 Exit 시점까지 유치한 전체 투자 금액이 EBITDA 대비 4배 가량의 투자를 유치하고 있음을 의미함

 

이와 같은 미국 스타트업 EV의 추세는, “훌륭한 프로덕트라면 글로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라는, 우리의 패러다임 기저에 있는 믿음에 정면으로 도전해 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동일한 단계의 동일한 프로덕트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국내에서 총 1,000만 원짜리 시장을 창출한 우리 스타트업과 넓은 시장에서 10억 원짜리 시장을 창출한 스타트업은 이미 완전히 가치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지금까지 가져왔던 ‘훌륭한 프로덕트’에 대한 믿음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비즈니스 모델”이라던지 “흥미로운 (혹은 새로운) 프로덕트 컨셉트(Concept)”와 같은 것은 이미 수도 없이 존재하고 있어 그 자체로는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IP (Intellectual Property) 마저도, 시장의 성과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정말로 원천기술에 가까운 하이테크(High-tech)가 아닌 이상 마찬가지로 결국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특히 그것이 PCT 등과 같이 해당 글로벌 시장에서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닌 국내의 특허라면 그 의미는 더욱 퇴색될 것이다.

해외 시장에 와서 투자를 받고 난 후에라야 로컬리제이션(Localization)을 시작하면 된다는 믿음 역시 오류이다. 그와 같은 프로덕트의 선(先)설계-후(後)현지화에 대한 믿음은 오히려 성장의 모멘텀(Momentum)을 약화시켜 자신의 프로덕트와 시장 간의 관련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될 뿐이다. 게다가 “성장을 산다(Buying Growth)”는 표현이 일상화될 정도로 오버캐피털라이제이션(Overcapitalization)되어 있는 글로벌 생태계, 특히 미국 생태계 내의 경쟁자들을 고려해 보면 이는 결국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지름길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또, 초기 설계 단계에서부터 목표 글로벌 시장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아 완전히 관련성이 없는 프로덕트가 설계되어 개발이 진행된 경우에는 이와 같은 믿음이 전혀 동작할 수 없음 역시 물론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해당 시장 내에서 실제로 겨냥해야 할 시장의 규모는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그 초기 진입은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시장 진입에 필요한 인재들을 누구이며 그들을 어떻게 고용할 것인지”와 같은 실제적인 마일스톤(Milestone)과 그 달성방안들에 질문에 “그건 투자를 받고 나면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모호한 대답을 내어놓을 수 밖에 없는 지금의 패러다임을 수정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국내 시장에서 창업 후 해외 시장 진출’과 같은 수동적이며 조건부(條件附)적인 성격의 것으로부터, 실제 해외 시장에서의 창업을 고려하는 것을 포함하여 최대한 이른 시기에서부터 목표 시장을 학습하여 그와 높은 관련성(Relevance)를 가진 스타트업이 탄생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장황하게 설명하였으나, 이는 결국, 스타트업 라이프사이클(Life Cycle) 상 가능한 이른 단계에서부터 철저히 현지에서, 그 시장에 부합하는 프로덕트를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혹자는, 스타트업이 너무 초기에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것은 그 위험성이 너무 크다는 논리로 현재의 패러다임을 옹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가 비석세스(beSUCCESS)에 게재한 컬럼[2]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어차피 처음부터 시장을 학습하는 것이 숙명인 스타트업의 생리와 해외 생태계에 비해 결코 스타트업과 창업자들에 우호적이라 볼 수 없는 국내 생태계의 환경을 감안할 때, 필자는 도대체 어떤 이유로 가능한 초기부터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가는 것이 국내에서 작은 시장을 가지고 복닥이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인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모쪼록 오늘 이야기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빨리 이루어져 보다 많은 스타트업들이 보다 능동적으로 가능한 이른 시점에서부터 보다 넓은 시장에 도전하기를,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기 위한 많은 정책들 역시 스타트업들이 가능한 초기에서부터 해외 시장을 경험함으로써 해당 시장 내에서의 관련성을 높이고 성공 가능성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재편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Thomas S. Kuhn, First Published in 1962

[2] “해외투자유치, 지금처럼은 안된다”, http://kr.besuccess.com/2016/08/global-investment/

 

본 컬럼은 창조경제연구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KCEN 2016 No. 6 (11 월 호)에 게재되었습니다.